썰물 때 드러난 갯벌 표면의 갯지렁이 분변 더미

갯벌을 갈아엎는 엔지니어 — 갯지렁이의 생물교란이 바꾸는 퇴적물의 화학

썰물이 빠진 갯벌 위에 국수 가락처럼 둘둘 말려 쌓인 모래 더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몇 걸음 옆에는 얕게 파인 깔때기 모양 함몰이 있다. 이 둘은 한 마리 갯지렁이가 만든 굴의 입구와 출구다. 그 사이 수십 센티미터의 진흙 속에서, 산소와 황과 질소를 둘러싼 화학이 매 조석 주기마다 다시 쓰이고 있다.

핵심 요약

  • 세립질 갯벌 퇴적물에서 산소가 스며드는 깊이는 대체로 수 밀리미터 수준에 그친다. 그 아래는 산소가 없는 환원층이며, 삽으로 파냈을 때 드러나는 검은 층은 주로 황화철(FeS) 때문이다.
  • 갯지렁이류는 U자형 또는 J자형 굴을 파고 몸을 물결치듯 움직여 바닷물을 통과시킨다. 이 생물관개(bioirrigation)가 산소를 퇴적물 깊숙이 내려보낸다.
  • 해변에서 보는 분변 모래더미(cast)는 굴 아래에서 삼킨 퇴적물을 표면으로 밀어 올린 결과다. 퇴적물이 아래에서 위로 이동하는 컨베이어 벨트가 작동한다.
  • 서식지의 물리적 구조 자체를 바꿔 다른 생물의 생존 조건을 만드는 종을 생태계 엔지니어(ecosystem engineer)라 부른다.
  • 생물교란은 질소·황 순환을 촉진하는 동시에 묻혀 있던 탄소와 오염물질을 다시 꺼낼 수도 있다.

표층 몇 밀리미터, 그 아래는 다른 세계다

갯벌 퇴적물을 삽으로 뜨면 옅은 갈색 표층 아래에서 곧바로 짙은 회색 또는 검은색 층이 나온다. 이 색 경계는 산화-환원 불연속면(redox potential discontinuity, RPD)이라 불리는 화학적 경계다. 검은색의 정체는 대부분 미세한 황화철 입자로, 산소가 없는 조건에서 황산염 환원 미생물이 만든 황화수소가 퇴적물 속 철과 결합해 침전한 것이다.

산소가 얕은 깊이에서 끊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퇴적물 입자가 곱고 유기물이 풍부해 미생물의 호흡 속도가 빠른 반면, 산소가 공극수를 따라 확산되는 속도는 느리다. 유기물이 많은 니질 갯벌에서 산소가 표층 수 밀리미터, 때로는 1밀리미터 남짓에서 소진된다는 미세전극 측정이 널리 보고된다. 다만 절대값은 계절과 조위, 저서 미세조류의 광합성 여부에 따라 크게 흔들린다.

산소가 떨어지면 미생물은 차례로 다음 전자수용체를 쓴다. 질산염, 망간, 철, 황산염, 마지막으로 메탄 생성 순이다. 에너지 수율이 높은 것부터 소비되므로 이 순서는 깊이에 따른 층서로 나타난다. 갯벌의 화학은 몇 센티미터 안에서 완결되는 수직 지도인 셈이다.

굴을 파는 일은 산소를 배달하는 일이다

이 수직 지도를 헝클어뜨리는 것이 대형 저서동물이다. 유럽 갯벌의 대표종인 모래갯지렁이(Arenicola marina)는 J자에 가까운 굴을, 한국 갯벌에 흔한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Perinereis aibuhitensis) 같은 갯지렁이과 종들은 입구가 둘인 U자 또는 Y자형 굴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태는 달라도 원리는 같다. 몸을 파도처럼 굽이치게 해 굴 안으로 바닷물을 밀어 넣는 것이다.

이 행동을 생물관개라 한다. 핵심은 굴 벽면이 그 자체로 새로운 퇴적물-물 경계면이 된다는 데 있다. 굴 하나가 깊이 20센티미터로 뻗으면 원래 표면에서만 가능했던 산소 공급이 그 깊이에서도 국소적으로 일어난다. 갯벌 전체로 보면 퇴적물이 물과 접하는 유효 면적이 몇 배로 늘어난다. 다만 그 배율은 밀도와 굴 형태에 따라 편차가 커 일반화하기 어렵다.

갯벌 퇴적물 단면에서 U자형 굴과 그 주위에 형성된 산소 침투 영역을 보여주는 모식도
U자형 굴 주변으로 산소가 침투하는 범위를 나타낸 퇴적물 단면 (모식도)

모래 국수와 깔때기 — 표면에 남는 흔적

표면의 두 흔적은 굴 내부의 작동 방식을 드러낸다. 모래갯지렁이 같은 종은 굴의 머리 쪽 끝에서 아래를 향한 채 퇴적물을 통째로 삼키고, 소화하고 남은 무기 입자를 반대쪽 출구로 배출한다. 그래서 한쪽에는 퇴적물이 함몰되며 깔때기 모양 구멍이 생기고, 다른 쪽에는 배출된 모래가 실타래처럼 쌓인 분변 더미가 남는다.

이런 섭식 방식을 컨베이어 벨트 섭식이라 부른다. 깊은 곳의 퇴적물은 계속 표면으로 올라오고, 표면 물질은 깔때기를 따라 아래로 흘러든다. 갯벌 표층은 겉보기와 달리 정지해 있지 않고 통째로 뒤집히는 순환 벨트에 가깝다. 조간대 퇴적층의 이력을 층서로 읽으려는 연구가 까다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태계 엔지니어’라는 개념

1994년 존스(C. G. Jones)와 로튼(J. H. Lawton), 샤착(M. Shachak)은 생물 간 영향을 포식이나 경쟁만으로 설명하는 틀이 좁다고 지적하며 생태계 엔지니어 개념을 제안했다. 어떤 종은 자원을 직접 주고받는 대신 물리적 환경 자체를 개조해 다른 종이 쓸 수 있는 자원의 흐름을 바꾼다는 것이다. 비버의 댐이 교과서적 사례로 인용되지만, 갯벌의 굴 파는 무척추동물은 훨씬 조용하고 넓은 규모의 사례다.

굴은 그 자체로 다른 생물의 서식 공간이 된다. 벽면에는 산소가 있는 조건과 없는 조건이 밀리미터 단위로 맞붙어 있어, 질산화 세균과 탈질 세균처럼 서로 다른 요구를 가진 미생물이 나란히 산다. 소형 저서동물(meiofauna)은 굴 주변에 밀집하고, 일부 갑각류와 작은 다모류는 남의 굴에 얹혀산다.

생물교란이 활발한 퇴적물과 그렇지 않은 퇴적물의 산화층·환원층 구조를 나란히 비교한 모식도
생물교란이 있는 퇴적물과 없는 퇴적물의 층 구조 비교 (모식도)

물질순환을 바꾸지만, 방향은 하나가 아니다

효과가 가장 뚜렷한 곳은 질소 순환이다. 암모니아를 질산염으로 바꾸는 질산화는 산소를 필요로 하고, 질산염을 질소 기체로 되돌리는 탈질은 산소가 없어야 한다. 두 과정이 이어지려면 산소가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굴 벽면이 그런 경계를 대량으로 만든다. 그래서 굴이 많은 퇴적물에서 질산화-탈질 커플링이 촉진되어 질소가 계에서 제거되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보고가 축적되어 있다. 다만 유기물 부하가 지나치게 높으면 암모니아로 되돌리는 경로가 우세해진다는 반대 관측도 있다. 황 순환도 양면적이다. 생물관개는 황산염을 깊이 공급해 황산염 환원을 부추기는 동시에, 산소를 넣어 황화물을 다시 산화시킨다.

보전 관점에서 더 예민한 것은 탄소다. 갯벌 퇴적물은 산소가 부족한 덕분에 유기탄소를 오래 붙잡아 두는데, 생물교란은 바로 그 조건을 흔든다. 묻혀 있던 유기물에 산소가 다시 닿으면 분해가 재개되고 저장된 탄소의 일부가 이산화탄소로 돌아갈 수 있다. 반대로 생물교란이 유기물을 더 깊이 밀어 넣어 장기 보존을 돕는다는 관측도 있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입도와 유기물의 화학적 안정성, 교란의 깊이와 빈도에 달려 있으며 지금도 정량화가 진행 중인 쟁점이다. 같은 논리가 오염물질에도 적용된다. 과거 퇴적층에 갇힌 중금속이나 잔류성 유기오염물질이 다시 표층으로 올라올 수 있어, 오염 퇴적물 관리의 실제 변수다.

남은 한계

생물교란을 정량화하려는 시도는 대개 퇴적물 혼합을 확산 계수처럼 취급한다. 편리하지만 실제 교란은 무작위 확산이 아니라 종마다 정해진 굴 형태와 행동 양식을 따르며, 컨베이어 벨트 섭식자와 굴을 넓히기만 하는 종을 같은 계수로 묶을 수는 없다. 종별 기능형질을 반영한 지표를 쓰는 접근이 늘고 있으나 야외 검증은 까다롭다. 갯지렁이 개체군 자체도 수온과 먹이 공급에 따라 크게 오르내린다. 표면에 보이는 것보다 표면을 만든 동물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기여를 하나의 값으로 못 박기에는 아직 이르다.

참고: 생태계 엔지니어 개념은 Jones, Lawton & Shachak(1994, Oikos)에서 제안된 이래 저서생태학에 널리 적용되었다. 퇴적물 산화-환원 층서와 생물관개에 관한 서술은 해양 퇴적물 지구화학·저서생태학 분야 리뷰 논문의 일반적 합의에 기반하며, 구체적 수치는 지역과 계절에 따라 편차가 크다.

썸네일 사진: Lusi Lindwurm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독일 바덴해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한국 갯벌 현장이 아니라 현상 참고 사진이다.

작성 · Inkmarsh 편집팀 — 갯벌 생태·보전 연구를 논문과 1차 자료 기준으로 해설합니다. 본 콘텐츠는 과학 정보·해설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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